사건의 상호성

그 글을 읽고 나도 처음에는 북받쳐 올랐다. 하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식으면서 생각했다. 나라면 저 일을 글로 쓸까 쓰지 않을까? 글을 쓰는 사람은 대략 안다. 어떤 소재와 시각을 버무리면 어떤 반응이 나오리라는 것을. 말하자면 ‘각’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정도의 소재라면 이미 알고 쓴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글이 나가면 반응이 올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쓸 수 없어진다. 타인의 사생활 가운데서도 정수인데다가 이미 반응을 알 것 같은 글은 힘이 들어가서 편하게 쓸 수가 없어진다.

물론 장사 하루이틀 하는 게 아니니 그렇게 힘이 들어가 쓰기가 편하지 않더라도 요리조리 피해가며 다 쓸 수 있기는 하다. 읽는 사람도 눈치채지 못하게 쓸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적어도 내게는 너무 그렇다. 그래서 내가 사람 이야기를 거의 쓰지 않는다. 모든 사건에는 상호성이 작용한다. 사건 한 쪽에 내가 있다면 다른 한 쪽에는 상대방이 있다. 물론 외출했다가 발을 헛디뎌 자빠지는 사건처럼 상호성이 없는 사건도 있기는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사건은 대체로 상호성이 강하다.

그래서 사람 이야기를 쓰려 하지 않고, 그탓에 인간미가 없다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글쓰기가 직업인 사람으로서 고민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나에게도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는 글을 써서 털어버리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사건들이 있다. 하지만 상호성이 내 발목을 잡는다. 싫은 사람이라도 최소한의 존중을 해야 한다. 그렇기에 아예 쓰지 않으려 한다. 무엇이 잘 팔리는지 알고 있더라도 꼭 그것을 할 수 있거나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어제도 나는 그 글을 읽고 고민했다. 역시 저렇게 써야 더 잘 팔리나? 물론 그가 일부러 그 이야기를 글로 쓰지는 않았을 거라 믿는다. 그는 이 슬픈 일을 글로 쓰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걸 믿어 의심치는 않지만… 죽음? 꼭 쓰거나 말해야 사건이 존재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최악이다. 사람에게는 상상력이라는 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