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실제로 만나러 가는 길에 나는 광화문 교보에 들러 연필 셋트와 작은 스케치북 그리고 지우개를 샀다. 대학 때 미술 교양 수업을 들었는데 교수에게 잘 그린다는 칭찬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기억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다고 그래서(대략 25년쯤이다) 주섬주섬 그런 것들을 샀다. 다른 농도 심을 끼운 연필 여섯 자루 한 셋트(스태들러)와 나머지였다.
그걸 주면서 나는 그랬다. 그림 어쩌구 이야기를 하기에 사왔다. 하지만 딱히 뭘 하라고 산 건 아니다. 하루에 선 하나라고 그어보면 좋고 아니면 그냥 눈에 띄는 데다 두고 가끔 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뭐라도 하고 싶어질지 어찌 알겠느냐고. 그는 마치 이런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듯 아무런 조건도 없는 것이냐고 물었다.
당연히 없다. 뭐 그림을 그려서 보여줄 것도 아니고 보고 싶은 생각도 없다. 난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샀을 뿐이라고 그랬다. 나는 사소한 것들의 힘을 믿는 사람이라서 내가 들인 자원의 총량에 비해 받는 사람이 즐거울 수 있는 선물 하기를 좋아한다. 아니 물론 그렇다고 맨날 그런 걸로만 퉁치려 드는 사람은 아니고…
집에 오면서 연필깎이를 까먹었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