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몫의 불운에 대해 곱씹어 본 일요일

눈을 뜨자마자 부지런히 움직였다. 계란을 삶으면서 양배추 한 통을 썰어 절이는 가운데 커피를 내렸다. 세탁기를 돌리고 순두부가 먹고 싶어져 마트에 갔다왔다. 찌개를 끓이고 양배추 시오콘부 무침과 오랫동안 먹고 싶었던 감자 계란 샐러드를 만들어 저속노화밥과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고구마를 오븐에 굽는 가운데 부엌을 치우고 재활용 쓰레기를 한바탕 정리하고 집을 쓸고 닦은 뒤 고양이와 인간의 화장실을 각각 청소하고 케틀벨을 잠깐 하고 샤워를 했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고 들어왔다.

여느 일요일 두 배 수준의 가사노동을 했다. 위기의식 때문인 걸까? 평소보다 몸이 훨씬 더 잘 움직여졌다. 이런 상황이 싫다. 사실은 이럴 상태가 아닌데 일종의 시급함을 느껴 나를 짜내기는 상황이 싫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라도 해야만 하는, 정말로 시급한 상황일 수 있다. 지금까지 살면서 만만치 않은 몫의 불운에 시달려 왔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괜찮을 수 있을까?

Wham! 다큐멘터리 (2023)

두 갈래로 재미있었다. 첫째, 실질적으로 해체한 이후에 관심을 가졌기에 접하지 못했던 왬 전성기의 활동 모습을 볼 수 있었다(유튜브를 뒤지면 나왔겠지만 사실 잊고 있었던 터라…). 그리고 둘째, 나 말고 많은 이들이 궁금했을 앤드류 리즐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왬도, 세계적인 팝스타가 된 조지 마이클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반열에 오른 조지 마이클은 전혀 행복했던 것 같지 않지만.

다큐멘터리를 보고 기회가 있었음에도 조지 마이클의 공연을 보지 않았던 2007년쯤의 결정을 후회했다. 그가 오십 대 초반에 세상을 떠날 줄 어찌 알았으랴.

‘플래시’와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에즈라 밀러를 꾹 참고 본 ‘플래시’는 지금까지 나온 DCEU 영화 가운데 가장 영화 같았다. 그냥 만 얼마 내고 두 시간 얼마 동안 시간 때우려고 보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DCEU 전체를 놓고 볼 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보면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는 저스티스 리그 영화를 먼저 만들어 이들을 출연시키고 ‘오리진 스토리’까지 써버린 것이 DCEU의 패착이라고 본다. 천천히 세워 나갔어야 되는데 너무 성급했다.

한편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기대 만큼 재미있지 않았다. 멀티버스가 존재하고 무수히 많은 스파이더맨 또한 있다는 설정은 이제 전편 뿐만 아니라 MCU에서도 써버려서 전혀 새롭지 않다. 따라서 스파이더맨 물량공세로 나서기 보다 좀 더 나은 이야기와 전개에 승부를 걸었어야 했다. 2D 만화 영화로 얻을 수 있는 시각적 효과는 이번 편에서는 되려 산만했다. 엄청나게 별로고 재미가 없었느냐? 그런 정도는 아니지만 2시간 20분을 끌어나갈 긴장감을 느끼지 못했다. 요즘 영화들이 너무 길다. 이런 만화영화라면 1시간 40분이면 충분하다고 믿는다.

고향과 빵

영상을 보고 생각했다. 외롭지 않을까? 영상의 제빵사는 도쿄에서 게임회사를 다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1인 빵집을 열었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 짬짬이 살림을 하며 빵을 굽는데 판매 준비에만 9시간이 걸린다. 판매에 드는 시간은 별도니까 하루에 15시간 정도 노동을 한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빵을 사러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할 환경은 아니라서 정말 계속 빵과 가게에만 매여 있는 셈이다. 저런 삶이 괜찮을까? 라고 궁금해졌지만 생각해보니 내가 딱히 다르게 사는 것도 아니고 저 제빵사는 가족도 있다. 게다가 도쿄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돌아왔다면 이미 이렇게 살 마음의 준비를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은 가운데…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사실이 왠지 부러웠다. 물론 나에게도 고향이 없는 것은 아니고 물리적인 거리는 역대로 가장 멀어 보이지만 애초에 심정적인 거리가 가까워져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갈 곳이 있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딱히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제3의 직업 또는 생계수단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빵을 구우면 참 좋을 것 같긴 하다… 영상의 빵들이 특히 맛있어 보여 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채널에서 소개하는 빵들 상당수가 굽는 사람의 즐거움에 맞춰져 있는 듯 보이는데 저 빵들은 드물게 안 그랬다.

 

사건의 상호성

그 글을 읽고 나도 처음에는 북받쳐 올랐다. 하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식으면서 생각했다. 나라면 저 일을 글로 쓸까 쓰지 않을까? 글을 쓰는 사람은 대략 안다. 어떤 소재와 시각을 버무리면 어떤 반응이 나오리라는 것을. 말하자면 ‘각’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정도의 소재라면 이미 알고 쓴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글이 나가면 반응이 올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쓸 수 없어진다. 타인의 사생활 가운데서도 정수인데다가 이미 반응을 알 것 같은 글은 힘이 들어가서 편하게 쓸 수가 없어진다.

물론 장사 하루이틀 하는 게 아니니 그렇게 힘이 들어가 쓰기가 편하지 않더라도 요리조리 피해가며 다 쓸 수 있기는 하다. 읽는 사람도 눈치채지 못하게 쓸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적어도 내게는 너무 그렇다. 그래서 내가 사람 이야기를 거의 쓰지 않는다. 모든 사건에는 상호성이 작용한다. 사건 한 쪽에 내가 있다면 다른 한 쪽에는 상대방이 있다. 물론 외출했다가 발을 헛디뎌 자빠지는 사건처럼 상호성이 없는 사건도 있기는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사건은 대체로 상호성이 강하다.

그래서 사람 이야기를 쓰려 하지 않고, 그탓에 인간미가 없다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글쓰기가 직업인 사람으로서 고민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나에게도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는 글을 써서 털어버리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사건들이 있다. 하지만 상호성이 내 발목을 잡는다. 싫은 사람이라도 최소한의 존중을 해야 한다. 그렇기에 아예 쓰지 않으려 한다. 무엇이 잘 팔리는지 알고 있더라도 꼭 그것을 할 수 있거나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어제도 나는 그 글을 읽고 고민했다. 역시 저렇게 써야 더 잘 팔리나? 물론 그가 일부러 그 이야기를 글로 쓰지는 않았을 거라 믿는다. 그는 이 슬픈 일을 글로 쓰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걸 믿어 의심치는 않지만… 죽음? 꼭 쓰거나 말해야 사건이 존재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최악이다. 사람에게는 상상력이라는 게 있다.

이사 전야

이제 그만.

얼마든지 더 할 수 있다. 일거리는 계속 나올 것이다. 이사갈 집의 가구 배치에 대해서도 아직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만. 내일이 오면 또 어떻게든 될 것이다.

그렇다, 어떻게든 될 것이다. 이게 되지 않아서 지난 1년 동안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었다. 사실 최악과 최선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상태와 단계들이 놓여 있다. 그리고 삶과 그 속에서 내리는 온갖 결정과 등은 그 무수히 많은 단계 어디쯤에 놓인다. 그런데 ‘어떻게든 될 것이다’가 안 되면 최선 아니면 최악만이 벌어질 거라 생각하게 된다. 아니, 실제로는 최악만이 유일한 선택지라 여겨 버린다.

그렇게만 선택하는 수렁에서 벗어난 것 같으므로 이 상태를 좀 더 즐기기로 했다. 이사 전날, 결국 모든 일은 예상대로 벌어졌다. 대출도 아무런 문제 없이 연장되었고 내가 받아 나가야 하는 돈도 문제 없이 들어올 것으로 확정되었다. 8시쯤 짐을 빼러 온다는 확인 전화도 받았다. 이사갈 집에서 짐을 부리기 위한 주차 문제도 해결된 것 같다. 전반적인 컨디션도 좋다. 4년 전처럼 혼자이지만 이사를 마치고 병원에 찾아가야 할 것 같은 상태는 아니다.

그래서일까, 온갖 우울했던 예전 이사들의 기억이 별로 나지 않는다. 순간순간 문득 떠오르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넘겨버린다. 언제나처럼 깊이 곱씹지 않는다. 하, 그런 일도 있었지.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간다.

그래,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 동네에서 무엇을 마지막으로 할까 망설이다가 해가 지기 전에 산책을 잠시 했다. 이곳에서 살았던 4년은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좀 더 깊이 생각하고 과감한 선택을 했었어야만 했다.

서 현 교수

잠이 안 오는 새벽에 우연히 신문에 실린 서 현 교수의 글을 읽고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왜 그랬더라?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는 여전히 자신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약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2000년이었던가? 그가 처음 부임해 학생들에게 인사를 했을 때를 기억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건축사 자격증을 딴 교수는 흔치 않았기도 했고, 책이 큰 인기를 끈 다음이었기에 그의 부임은 큰 일이었다. 그런 인사 자리에서 그는 고속터미널의 센트럴 시티로 기억하는 프로젝트가 원래 자신의 것이었는데 도용당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이후로도 그의 인터뷰 같은 것들에서는 늘 그런 류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프로젝트에 당선이 되었는데 현실화가 안 되었다 등등의 이야기들이다. 건축보다 훨씬 더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는 분야에서 적이 없이 평론가랍시고 일하는 나로서는 굴지의 대학 교수가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같은 분위기의 이야기 하는 걸 듣고 있노라면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그는 건축과로 유명한 학교에서 근 20년 가까이 교수로 재직하다가 결국 한국에서 가장 좋은 학교인 자신의 모교로 옮겨갔다. 일반적으로도, 또 건축에서도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길을 걸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커리어이다. 그런 자리에서도 자신의 몫 만큼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교수직을 내놓고 그냥 실무만 하는 건 어떨까? 그럼 좀 더 많이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궁극적으로 불쾌한 지점은 그의 글이 보여주는 시각과 태도가 20년도 더 된 책 ‘건축, 음악처럼 보고 미술처럼 보다’에서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세월 동안 대체 뭘 한 건지 궁금하다. 이제 건축을 안 하는 나도 이렇게 짜증이 나는데 현업 종사자들은 어떤가 싶어서 물어보았더니 대체로 싸우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싫은 소리 안 하고, 어차피 그냥 꼰대가 꼰대 소리 하는가보다 생각하고 넘긴다는 답을 들었다. 서울대 나와서 미국 유학 가서 미국 건축사 따고 한국의 가장 좋은 대학들에서 이십 년 넘게 가르치는 교수가 바꿀 수 없는 세상이라면 그건 인간이 살 수 없는 곳 아닐까? 사람이 자신의 포지션에 맞는 의견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그의 글은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개인적인 차원의 푸념일 뿐이다.

발버둥

오늘도 밖에 나왔다. 집에서 뒹굴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 몇 시에 일어나든 최대한 빨리 밥을 챙겨 먹고 뜨개거리와 책을 챙겨서 나온다. 목표는 일단 500칼로리 소비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발적으로 별도의 운동을 하는 나날은 당분간 절대 찾아올 것 같지 않으므로 몸을 움직이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

내과 선생님은 검사 결과를 보고 거의 신경질을 냈다. 오히려 그가 감정적을 드러내는 게 나에게는 힘들었다. 그 감정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수치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의 육체적인 건강이 요즘 썩 좋지 않지만 어쩌면 수치화하기 힘든 정신적인 건강은 그보다 더 좋지 않다. 정신적인 건강에 맞물려 육체적인 건강도 나빠지는 것이 확실한데 그런 사정을 이야기하기엔 그의 신경질이 너무 빽빽했다. 아니 뭐, 그가 안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생일

눈을 떠보니 고양이는 습식 사료를 먹고 카페트에 토했고 금식 후 주린 배를 움켜쥐고 간 병원에서는 건강이 더 나빠졌다며 의사 선생님이 다그쳐서 뭐라고 제대로 말도 못했다. 여러모로 사면초가의 기분이지만 오늘 하루 만큼은 행복하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