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봉인

12월이 되자마자(카드 결제가 넘어가자마자) 외장하드를 하나 더 사서 타임머신 백업을 돌리고 있다. 컴퓨터의 내장 저장공간이 3테라에서 1테라로 줄어들면서 데이터의 일부는 클라우드로, 일부는 외장하드로 옮겼는데 기억이 재배치된 느낌이다. 비물리적 데이터를 저장장치에 담아두면 검색에 의해 얼마든지 필요한 걸 그때그때 찾아서 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는 항상 일종의 물리적(사실은 이 또한 비물리적이지만) 저장체계가 그 사이에 개입하기를 원한다. 최근 매체에서도 보도한 것처럼 정보의 위치나 위계 등을 ‘폴더’의 단위로 기억하는 것이다. 이런 습성도 이제 구세대의 유물이라며.

저장장치를 교체하고 새로 OS를 깔았더니 컴퓨터가 스스로를 새 것으로 인식하는 바람에 타임머신용과 일반 데이터용 외장하드를 하나씩 사야만 했다. 예전 타임머신의 하드를 포맷시키고 쓸 수도 있었겠지만 그럼 그 지점까지의 데이터를 잃게 되므로 돈이 아깝지만 새로 하드를 하나 더 사고 이전의 타임머신에 담긴 기억을 봉인시켰다. 한 달째 컴퓨터를 복구하면서 그래서 내부 저장장치게 담겨 있던 데이터 가운데 뭐가 중요한가 생각해 보았는데, 심심풀이로 만든 노래의 거라지밴드 파일 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내게는 잃을 수 없는 자료이다.

생계의 핵심인 문서 파일들이야 원체 용량이 크지 않으므로 클라우드에 올려 놓고 백업 걱정 같은 거 내려 놓은지가 7~8년이지만 영상 등의 데이터는 아직도 ‘로컬’ 저장장치가 필요하다. 그냥 가끔 비디오 찍은 아마추어 가운데 아마추어도 이럴진대 영상이 업인 사람들은 대체 데이터 관리에 얼마 만큼의 자산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홈트의 생활화를 위해 발버둥치는 가운데, 오늘은 링피트를 30분 했다. 스무디 만드는 믹서를 찾으러 들어갔는데 복근 싸움에서 에너지가 다 떨어져서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에너지를 보충하려면 스무디를 먹어야 하는데 믹서가 없다. 아무래도 여기에서 계속 돌다가 포기할 것 같다. 배에 링콘을 대고 누르면 미끄러져서 복근 싸움에서 불리하다.

작년 이맘때 있었던 일

그러니까 작년 이맘때, 나는 강남으로 찾아가 출판사의 새 편집장을 만났다. 그해 봄, 어찌된 영문인지 편집장이 갑자기 나가면서 내부 승진이 이루어졌으니 새 편집장도 구면이었다. 아무래도 편집장이 바뀌었으니 이미 낸 책과 전 편집장이 나가기 전까지 앞으로 내기로 한 책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지만 당장 급한 건 없었기에 나는 먼저 메일을 보내 6개월 뒤 쯤, 연말에 만나자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나서 출판사 앞의 어느 카페에서 만났을 때, 새 편집장은 내가 왜 만나자고 하는지 이유를 몰랐다고 말했다. 편집장이 바뀌는 시점에서 내 책을 더 이상 내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고, 이를 전 편집장에게 말하고 나가라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전 편집장은 이미 6개월 전 이미 결정되었던 사항을 나에게 전달하지 않고 그냥 퇴사해 버린 것이었다. 그와 퇴사 직전까지 책과 원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어떤 구석에도 내 책을 출판사가 더 이상 내지 않겠다는 낌새는 알아챌 수가 없었다. 한편 새 편집장은 이미 나에게 이야기가 전달된 줄 알고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가 내가 만나자고 하니 영문을 몰랐던 것이다. 서로 할 말도 없고 더 해서, 커피를 다 마시고 우리는 헤어졌다.

나머지 이야기는 하면 내가 구차해져서 일단 그만 쓰겠다. 하여간 작년 이맘때 그런 일이 있었다.

11월

컴퓨터를 고치고 복구하는 과정에서 상실감에 시달리는 가운데, 11월에는 나를 평소보다 더 미워했다. 내가 이런 것을 견디기 어려운 때가 종종 온다. 약 20일에 걸쳐 복구를 끝내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제 12월이다.

취소

한 6개월 전에 잡혀 있었던 강연 요청이 열흘 남겨 두고 취소되었다. 오늘 드디어 귀찮음을 무릅쓰고 자료를 만들기 시작하던 차에 메일을 받아서 그저 황당했다. 기왕 취소할 거라면 노동력을 투입하기 전에 알려주지. 하도 이런 일이 많다 보니 실제로 일을 하기 전까지는 안심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요즘 이런 일들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는데, 지난 주에는 단 며칠 내로 광주에 가서 김병현이 운영하는 음식점의 음식 맛을 보고 평가해줄 수 있느냐는 예능 섭외 비슷한 게 들어왔다. 그저 ‘비슷한 거’인 이유는 결국 성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통화에서는 전국 몇 대 버거를 맛 본 사람 컨셉 같은 걸로 갈 수 있느냐고 물어봐서 딱 잘라 못한다고 그랬고 촬영 일자는 그렇게 지나갔다.

또 다른 건은 비서울의 라디오 출연이었는데 생방송이고 궁극적으로 대본도 내가 쓸 수 밖에 없는 여건인데, 전화를 걸어 온 작가에게 출연료를 물었더니 피디가 전화할 거라며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열흘이 지났고 방송한다고 한 날짜는 이주일도 안 남았으니… 아마 연락이 오지 않을 것이다.

야구에서는 3할만 쳐도 엄청난 타자 대접을 받는데 프리랜서의 세계에서는 1할만 거래가 성사되어도 정말 대단한 일이다. 프리랜서로 살면서 인간을 향한 불신이 늘었다.

왠지 쌓이려는 울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편의점에서 2+1 행사하는 하겐다즈 파인트를 사왔다. 9월에 참았고 10월엔 행사를 안 했으니 이번 달엔 괜찮겠지.

마감

번역서를 마감했다. 오늘이 원래 마감일이었는데 혹시 몰라서 일주일~열흘만 더 달라고 했고 일주일은 되지만 열흘은 안된다는 답을 들었는데 더 끌지 않고 끝낼 수 있었다. 이제 더 원고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시점이 되기도 했고. 보통 주말에는 업무 메일을 보내지 않지만 그래도 오늘이 계약 기간상의 마감일이었으므로 그냥 보내버렸다. 발에 극세사 담요를 덮고 유튜브 영상을 뒤적이다가 잠들어 10시에 깨어났다. 덕분에 이번 주 로또는 건너 뛰었다.

이제 5일의 외고 마감 하나 남았다. 9월도 너무 빨리 간다고 그랬는데 10월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제오늘

어제는 갑자기 미팅이 잡혀 시내를 나간 김에 우래옥에 들러 김치말이를 먹고 잠깐 바에 들렀다. 진짜 마음의 여유가 없는 가운데 갑작스레 잡힌 미팅이라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는데, 그래도 덕분에 잠깐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우래옥은 이제 실내 대기가 아예 불가능해졌고, 드디어 전자기기로 대기를 받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불러 일으키는, 어쩔 수 없는 변화들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오늘은 일찍 일어나 고향팀 야구를 보고 승리 덕분에 차분해진 마음으로 마감을 쳤다. 11월 첫째 주까지 마감 두 개만 더 쳐내면 상황이 좀 나아질 것 같은데… 어쩌면 착각일 수도 있다. 하여간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좀 쉬어야 한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비스킷과 만두

어젯밤에만 해도 오랜만에 비스킷을 구워 먹고 싶었으나 정작 아침에 일어나니 귀찮아서 뒹구는 사이에 배가 고파져서 아무 거나 먹고 치웠다. 클로티드 크림이 이미 썩었을지도 모르겠다. 점심으로 짜파게티를 끓여 먹고는 쓰러져 자서 해가 진 다음에서야 일어났다. 모든 게 귀찮았지만 그래도 간신히 청소를 끝냈다. 어른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내일 덜 짜증이 날 테니까. 게다가 다음 주는 꽤나 바쁠 것이다. 정말 다음 주만 잘 넘기면 된다. 어제 일을 했더니 주말이 너무 짧았다. 나는 어제 정말 이를 박박 갈면서 책상에 앉아 있었다. 지금도 이가 막 갈린다.

오늘은 만두 생각을 했다. 트렌치코트를 입고 외출했다가 어딘가에서 맛있는 만두를 사서 식기 전에 집에 돌아와서 나눠 먹는 생각인데… 일단 맛있는 만두부터 드물고 집에는 나눠 먹을 사람이 없다. 그리고 외출할 마음의 여유도 없다. 그냥 나랑 트렌치코트만 집에 덩그러니 있는 현실 너무 좋다. 현상유지에만도 너무 많은 자원이 든다.

잠과 가위

6시쯤, 1시간만 더 일하려다가 피곤함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쓰러져 잤다. 평소라면 1시간 이내로 깨어나는데 눈을 떠보니 9시가 다 되어 있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가위에 눌려서 소리를 질렀다. 학창시절이나 군대로 돌아간 걸까? 이번엔 또 뭔가에 쫓겼을까?

오랜만에 불이 붙은 마음으로 브레이브스 야구를 보고 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이렇게 감정이입을 해서 보는 건 처음 같다. 그만큼 올해의 팀이 좋다. 다른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우리 팀이 질 것이라는 생각을 기본으로 깔고 본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올해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는다. 질 것 같지 않고, 져도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애틀랜타에 가고 싶어졌다. 나는 돌아온 이후 단 한 번도 그곳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아왔다. 많은 것이 바뀌었을 테지. 심지어 야구장도 새로 지은 것이니까. 요즘도 가끔 낮이든 밤이든 침대에 자려고 누우면 그곳의 경치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요즘 정말 날씨가 너무 좋을 텐데. 야구를 보기도 좋고, 그냥 산책만 해도 너무 좋을 텐데. 친구들은 이제 절반 정도 남아 있는 것 같다. 만나기도 뭐하고 안 만나기도 뭐한 친구들.

미친 꽈배기

연신내역 사거리를 지나쳐 q턴을 하는데 골목에 ‘미친 꽈배기’라는 꽈배기집이 있었다. 상호가 마음에 들어 내려서 미친 듯이 꽈배기를 사고 싶었으나 참았다. 어른은 그러면 안된다. 내부 순환을 타려고 3호선 라인을 따라 쭉 내려오다 보니 불광동 성당과 미성 아파트가 눈에 들어왔다. 대학 시절 좋아했던 사람이 그 아파트에 살아서 몇 번 왔다가 불광동 성당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둘 다 건축을 전공했던지라… 기도를 하려고 모은 손이 어쩌고저쩌고.

요즘의 가장 큰 과업이었던 일의 교통정리를 마쳤다. 11, 12월은 예정에 비해 조금 편하게 갈 수 있을 것 같다. 내부 순환로를 타면서 김사월의 ‘레슬러’를 들었다. ‘내 기억 속에서 내 마음 속에서 네가 계속 맞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어 싸우지 마라 그렇게 맞고 있지 않아도 네가 좋은 사람인 거 안다.’

‘싸우지 마라’에서 눈물을 흘릴 뻔 했다. 차마 ‘그렇게 맞고 있지 않아도 네가 좋은 사람인 거 안다’에서 흘릴 수는 없고.

제로 코크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다 못해 내가 쓰레기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너무 자주 있는 일인데, 상담 선생님은 이를 ‘침투사고’라 일컫는다고 했다. 하여간 침투사고에 화가 나서 요즘 CU에서 2+1로 행사하고 있는 제로 코크를 사서 벌컥벌컥 들이키며 예상보다 좀 더 걸었다. 담배나 술은 물론이거니와 보통 콜라도 최대한 피해야 하는 현실에서 결국 남은 건 구역질 나는 맛의 제로 코크 밖에 없어서 슬펐다.

냉장고가 거의 비어가는데 요즘 마트의 식재료는 너무 나쁘고 멀리 장을 보러 갈 시간은 좀처럼 나지 않는다. 대체 무엇을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 걸까? 사실은 그냥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매일매일 그날의 일 간신히 쳐내는 것 말고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