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4주 만에 찾아간 병원에서 나는, 바로 지난 번 내원까지도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이 거대한 감정이 무엇인지 드디어 알겠노라고 말했다. 그것은 분노였다. 좌절의 그루터기에 실망의 가지를 덧붙여 자란 나무에서 드디어 분노의 열매가 활짝 열리고야 말았다. 분노라는 감정에 어울리지 않으므로 수분 및 개화 과정은 건너 뛰었다. 그렇게 분노의 새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이제부터 수확에 들어가려 한다. 한참 동안 손이 모자랄 게 뻔한 일이므로 일단 문부터 좀 닫고 와야겠다. 푸대접을 하느니 차라리 문전박대가 훨씬 낫다. 다음에 오세요, 언제인지는 저도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에이, 언제 그렇게 찾아오셨다고 아쉬워하고 그러세요. 아, 오신 김에 잘 익은 분노 하나 나눠 드릴까요? 오래 가물어서 끝내주게 잘 익었어요.

후회

그럴 일을 잘 만들지 않기도 하고 나이를 먹은 만큼 마음의 낯짝이 두꺼워져서 별 생각 없는 척 넘어가기도 곧잘 하는데 이번엔 안 그랬다. 후회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와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생일을 앞두고는 과거를 평소보다 예년보다 많이 떠올렸다. 유치원 시절의 조개전을 비롯해 중학교 때의 계란말이 등 나의 기억 가운데서도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막 떠올랐고 약간 가시밭에 예고 없이 무방비로 내던져지는 느낌을 받았다.

벌어진 일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어떤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는 시나리오를 전력으로 궁리해서 짜내가지고는 머릿속에서 수십 수백 수천 번을 돌려 보고 또 돌려 보기도 한다. 마치 그러면 막기라도 할 수 있었을 것처럼. 하지만 사실 그럴 수조차 없는 일들이 더 많다. 그냥 벌어지는 나쁜 일들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걸 알게 된다고 마음이 아주 많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는 게 웃기고도 서글프지만 그렇다.

청소기

월요일에 참다 못해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청소기가 고장난지 일주일 남짓, 고양이와 같이 사는 인간이라면 스트레스를 받을 기간이다. 그런데 나는 집에서만 일하는 인간이다 보니 가끔 전화를 걸고 받기가 매우 내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 며칠 손을 놓고 있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전화를 걸었다. 일단 대표 전화로 걸었는데 상담사가 매우 친절했고, 거기에서 받은 번호로 마포구 센터에 전화를 걸었더니 거기는 더 친절했다. 예상 수리비 2만원에 수리 시간 20분이라는 말을 듣고 오늘 다녀왔다. 심지어 수리를 한 담당자도 너무 친절했는데 필터 상태가 너무 불량해 1만 6천원을 더 주고 교체해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청소기를 고쳤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내 몫의 불운에 대해 곱씹어 본 일요일

눈을 뜨자마자 부지런히 움직였다. 계란을 삶으면서 양배추 한 통을 썰어 절이는 가운데 커피를 내렸다. 세탁기를 돌리고 순두부가 먹고 싶어져 마트에 갔다왔다. 찌개를 끓이고 양배추 시오콘부 무침과 오랫동안 먹고 싶었던 감자 계란 샐러드를 만들어 저속노화밥과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고구마를 오븐에 굽는 가운데 부엌을 치우고 재활용 쓰레기를 한바탕 정리하고 집을 쓸고 닦은 뒤 고양이와 인간의 화장실을 각각 청소하고 케틀벨을 잠깐 하고 샤워를 했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고 들어왔다.

여느 일요일 두 배 수준의 가사노동을 했다. 위기의식 때문인 걸까? 평소보다 몸이 훨씬 더 잘 움직여졌다. 이런 상황이 싫다. 사실은 이럴 상태가 아닌데 일종의 시급함을 느껴 나를 짜내기는 상황이 싫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라도 해야만 하는, 정말로 시급한 상황일 수 있다. 지금까지 살면서 만만치 않은 몫의 불운에 시달려 왔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괜찮을 수 있을까?

사건의 상호성

그 글을 읽고 나도 처음에는 북받쳐 올랐다. 하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식으면서 생각했다. 나라면 저 일을 글로 쓸까 쓰지 않을까? 글을 쓰는 사람은 대략 안다. 어떤 소재와 시각을 버무리면 어떤 반응이 나오리라는 것을. 말하자면 ‘각’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정도의 소재라면 이미 알고 쓴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글이 나가면 반응이 올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쓸 수 없어진다. 타인의 사생활 가운데서도 정수인데다가 이미 반응을 알 것 같은 글은 힘이 들어가서 편하게 쓸 수가 없어진다.

물론 장사 하루이틀 하는 게 아니니 그렇게 힘이 들어가 쓰기가 편하지 않더라도 요리조리 피해가며 다 쓸 수 있기는 하다. 읽는 사람도 눈치채지 못하게 쓸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적어도 내게는 너무 그렇다. 그래서 내가 사람 이야기를 거의 쓰지 않는다. 모든 사건에는 상호성이 작용한다. 사건 한 쪽에 내가 있다면 다른 한 쪽에는 상대방이 있다. 물론 외출했다가 발을 헛디뎌 자빠지는 사건처럼 상호성이 없는 사건도 있기는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사건은 대체로 상호성이 강하다.

그래서 사람 이야기를 쓰려 하지 않고, 그탓에 인간미가 없다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글쓰기가 직업인 사람으로서 고민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나에게도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는 글을 써서 털어버리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사건들이 있다. 하지만 상호성이 내 발목을 잡는다. 싫은 사람이라도 최소한의 존중을 해야 한다. 그렇기에 아예 쓰지 않으려 한다. 무엇이 잘 팔리는지 알고 있더라도 꼭 그것을 할 수 있거나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어제도 나는 그 글을 읽고 고민했다. 역시 저렇게 써야 더 잘 팔리나? 물론 그가 일부러 그 이야기를 글로 쓰지는 않았을 거라 믿는다. 그는 이 슬픈 일을 글로 쓰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걸 믿어 의심치는 않지만… 죽음? 꼭 쓰거나 말해야 사건이 존재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최악이다. 사람에게는 상상력이라는 게 있다.

발버둥

오늘도 밖에 나왔다. 집에서 뒹굴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 몇 시에 일어나든 최대한 빨리 밥을 챙겨 먹고 뜨개거리와 책을 챙겨서 나온다. 목표는 일단 500칼로리 소비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발적으로 별도의 운동을 하는 나날은 당분간 절대 찾아올 것 같지 않으므로 몸을 움직이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

내과 선생님은 검사 결과를 보고 거의 신경질을 냈다. 오히려 그가 감정적을 드러내는 게 나에게는 힘들었다. 그 감정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수치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의 육체적인 건강이 요즘 썩 좋지 않지만 어쩌면 수치화하기 힘든 정신적인 건강은 그보다 더 좋지 않다. 정신적인 건강에 맞물려 육체적인 건강도 나빠지는 것이 확실한데 그런 사정을 이야기하기엔 그의 신경질이 너무 빽빽했다. 아니 뭐, 그가 안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생일

눈을 떠보니 고양이는 습식 사료를 먹고 카페트에 토했고 금식 후 주린 배를 움켜쥐고 간 병원에서는 건강이 더 나빠졌다며 의사 선생님이 다그쳐서 뭐라고 제대로 말도 못했다. 여러모로 사면초가의 기분이지만 오늘 하루 만큼은 행복하게 살고 싶다.

얼어 붙은 시간

밖에도 거의 나가지 않아 남는 게 시간이지만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얼어 붙은 시간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옴짝달싹 할 수가 없다. 간신히 밥을 먹고 간신히 일을 하고 남는 시간 거의 대부분에는 잔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자다가 일어나서는 뜨개를 좀 한다. 그거라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하고 싶은 일이 많지만 정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