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현 교수

잠이 안 오는 새벽에 우연히 신문에 실린 서 현 교수의 글을 읽고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왜 그랬더라?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는 여전히 자신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약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2000년이었던가? 그가 처음 부임해 학생들에게 인사를 했을 때를 기억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건축사 자격증을 딴 교수는 흔치 않았기도 했고, 책이 큰 인기를 끈 다음이었기에 그의 부임은 큰 일이었다. 그런 인사 자리에서 그는 고속터미널의 센트럴 시티로 기억하는 프로젝트가 원래 자신의 것이었는데 도용당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이후로도 그의 인터뷰 같은 것들에서는 늘 그런 류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프로젝트에 당선이 되었는데 현실화가 안 되었다 등등의 이야기들이다. 건축보다 훨씬 더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는 분야에서 적이 없이 평론가랍시고 일하는 나로서는 굴지의 대학 교수가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같은 분위기의 이야기 하는 걸 듣고 있노라면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그는 건축과로 유명한 학교에서 근 20년 가까이 교수로 재직하다가 결국 한국에서 가장 좋은 학교인 자신의 모교로 옮겨갔다. 일반적으로도, 또 건축에서도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길을 걸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커리어이다. 그런 자리에서도 자신의 몫 만큼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교수직을 내놓고 그냥 실무만 하는 건 어떨까? 그럼 좀 더 많이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궁극적으로 불쾌한 지점은 그의 글이 보여주는 시각과 태도가 20년도 더 된 책 ‘건축, 음악처럼 보고 미술처럼 보다’에서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세월 동안 대체 뭘 한 건지 궁금하다. 이제 건축을 안 하는 나도 이렇게 짜증이 나는데 현업 종사자들은 어떤가 싶어서 물어보았더니 대체로 싸우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싫은 소리 안 하고, 어차피 그냥 꼰대가 꼰대 소리 하는가보다 생각하고 넘긴다는 답을 들었다. 서울대 나와서 미국 유학 가서 미국 건축사 따고 한국의 가장 좋은 대학들에서 이십 년 넘게 가르치는 교수가 바꿀 수 없는 세상이라면 그건 인간이 살 수 없는 곳 아닐까? 사람이 자신의 포지션에 맞는 의견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그의 글은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개인적인 차원의 푸념일 뿐이다.

발버둥

오늘도 밖에 나왔다. 집에서 뒹굴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 몇 시에 일어나든 최대한 빨리 밥을 챙겨 먹고 뜨개거리와 책을 챙겨서 나온다. 목표는 일단 500칼로리 소비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발적으로 별도의 운동을 하는 나날은 당분간 절대 찾아올 것 같지 않으므로 몸을 움직이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

내과 선생님은 검사 결과를 보고 거의 신경질을 냈다. 오히려 그가 감정적을 드러내는 게 나에게는 힘들었다. 그 감정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수치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의 육체적인 건강이 요즘 썩 좋지 않지만 어쩌면 수치화하기 힘든 정신적인 건강은 그보다 더 좋지 않다. 정신적인 건강에 맞물려 육체적인 건강도 나빠지는 것이 확실한데 그런 사정을 이야기하기엔 그의 신경질이 너무 빽빽했다. 아니 뭐, 그가 안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생일

눈을 떠보니 고양이는 습식 사료를 먹고 카페트에 토했고 금식 후 주린 배를 움켜쥐고 간 병원에서는 건강이 더 나빠졌다며 의사 선생님이 다그쳐서 뭐라고 제대로 말도 못했다. 여러모로 사면초가의 기분이지만 오늘 하루 만큼은 행복하게 살고 싶다.

Writing to reach you

원래도 판에 박힌 말은 못했지만 이제는 진심도 꺼내 놓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얼어 붙은 시간

밖에도 거의 나가지 않아 남는 게 시간이지만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얼어 붙은 시간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옴짝달싹 할 수가 없다. 간신히 밥을 먹고 간신히 일을 하고 남는 시간 거의 대부분에는 잔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자다가 일어나서는 뜨개를 좀 한다. 그거라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하고 싶은 일이 많지만 정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소멸과 붕괴

꽤 한참 전부터 생각해 왔었다.

요즘

생각이 많다.

오늘 브로콜리 싱싱한가요

벽돌에게 물어본다. “무엇이 되고 싶으니?” 그럼 벽돌이 대답한다. “저는 아치가 되고 싶어요.”

– 루이스 칸 (1901~1974)

건축가 루이스 칸의 ‘벽돌과의 대화’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벽돌에게 물어보면 건물의 어떤 부분 혹은 요소가 되고 싶은지 대답을 해 줄 거라는 비유로 건축재료가 순리를 따라 되고 싶어하는 지향점, 즉 건축의 요소가 있을 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루이스 칸과 벽돌에 비하면 훨씬 실용적이지만 나도 그런 대화를 짐짓 머리에 그리며 이 원고를 썼다. 식재료가 순리를 따라 되고 싶어하는 음식과 요리의 지향점은 과연 무엇일까? 인간의 시각에서 말하자면 식재료마다의 ‘포인트’, 즉 알아둘만한 관련 지식이 되겠다. 양파에게 물어보았더니 진득하게 볶아 캐러멜화를 시켜 단맛을 뽐내고 싶어한다고 답했다. 딸기는 어차피 생으로 먹는 과일이니 오래 보존할 수 있는 손질법이 최고라고 말했다. 식초나 감칠맛 조미료라면 종류와 맛의 특성, 쓰임새 등을 두루 알리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그런 ‘식재료와의 대화’를 일상의 맥락에서 시도 및 정리해 한국일보에 ‘세심한 맛’이라는 제호 아래 연재를 했었다. 2018년부터 토요일의 지면을 맡아 격주와 매주를 넘나들며 3년여 동안 꼭 100화를 연재하고 마쳤다. 쌓인 원고를 일상의 체로 한 번 더 걸러 육십 여편의 원고를 추려 다듬은 책이 바로 본격 식재료 에세이 ‘오늘 브로콜리 싱싱한가요(이하 브로콜리)’이다.

한편 무던한 식재료 이야기를 쓰고 싶기도 했다. 두 갈래로 나뉘는 무던함인데, 일단 대상인 식재료 자체가 무던하다는 의미이다. 희귀하거나 비싸거나 쓰임새가 한정된 것들보다 동네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고 식탁에 흔히 오르는 식재료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한편 풀어내는 이야기가 무던하다는 의미이다. 식재료를 다루다 보면 호들갑을 떨기 쉽다. ‘신토불이’와 ‘제철’의 함정에 빠져 국산 식재료가 최고라고 떠든다거나, 이런 철에는 저런 식재료를 꼭 먹어야 한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는 것이다. 미식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재료론인데 최대한 피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일상의 최전선에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하는 이들에게 더 잘 먹을 수 있는 요령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글에 담아 소개하고 싶었다.

때로 레시피도 소개하지만 ‘브로콜리’는 요리책이 아니다. 굳이 구분을 하자면 요리책으로 공부를 하기 전에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요리에 밑준비가 필요하듯 요리 공부의 밑준비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내가 생활인으로서 경험 및 검증해 담았다. 따라서 요리의 초기 계획 단계부터 참고하면 기초를 잘 다지는데 확실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 음식과 요리에서 기초란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중요하다. 따라서 기초를 최대한 다듬어 담은 ‘세심한 맛’이 연령대나 조리의 숙련도를 타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한다. 조리에 막 관심을 가져보려는 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지식을 제공할 것이며, 익숙한 이들에게는 새로운 요령을 보충해 줄 것이다. 그런 가운데 나는 ‘세심한 맛’이 특히 생존의 차원에서 조리에 관심을 가지려는 이들에게 닿기를 희망한다.  코로나의 팬데믹 시국이 대세인 배달과 포장 음식의 입지를 확고히 굳혔다. 하지만 인간은 똑같은 음식만 먹고 살 수 없으며 끊임없이 다양성을 꾀한다. 파는 음식을 먹다 먹다 지겨워 생존의 차원에서 다양성을 위한 자가 조리도 고려해 보는 이들에게 ‘브로콜리’가 길잡이 노릇을 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브로콜리’는 큰 그림에 맞춰 나온 칼럼이자 책이다. 2013년 ‘외식의 품격’으로 발걸음을 내딘 식문화 총서의 한 권을 이루는 가운데, 특히 2020년 출간된 ‘조리 도구의 세계(반비)’와 짝을 이룬다. 각각 식재료와 조리 도구의 기초 지식을 제공하니 두 책만 있다면 나만의 부엌 살림을 꾸려 나가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으리라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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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모처럼 행복했다.

마음으로 피흘리는 나날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죄송하다는 메일을 두 통 썼다. 아침 간신히 차려 먹고는 대본을 뽑아서 큰 소리로 여러 번 읽었지만 아무 것도 머릿속에 남지 않았다. 설마했지만 진짜로 현장에 가서도 머릿속이 완전히 백지였으니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이런 날도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넘기기에는 ‘이런 날’ 자체가 너무 길어지고 있다. 상당 부분 시간이 해결해줄 거고 나는 그동안 버티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은 건 참으로 오랜만이다.

내일도 죄송하다는 메일을 또 한 통 써야 한다. 마음으로 피흘리는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다.